여행으로 즐기는 세상
독서여행
어릴 적부터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요. 거기에 부모님께서 비디오대여점을 하셔서 만화를 좋아하는 저에게 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죠. 드래곤볼, 다간, 건담, 카트캡터 체리, 짱구 등 당시 가게에 있던 만화란 만화는 모두 봤어요. 하지만 어른들은 만화를 부정적으로 보셨어요. 당시 대부분 만화는 치고받고 싸워 정의가 이기더라도 폭력성이 짖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액션 만화예요.
중학생이 되곤 부모님은 비디오가게를 접으셨어요. 이제 만화를 더 이상 공짜로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슬프더군요. 하지만 이때쯤 케이블 채널이 많이 생기면서 TV에서 과거 만화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던 만화를 이제 시간마다 챙겨봐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만화와의 연은 끊을 수 없었죠.
하루는 TV에 행동이 느릿느릿한 해달과 심술궂은 너구리, 새초롬한 다람쥐가 나와 일상을 보여주는 만화가 방영됩니다. 해달의 행동을 보고 있으니 답답했어요. 이런 해달을 성질 급한 너구리가 재촉하고 화도 내더라고요. 무슨 이런 만화가 있나 했는데, 어느새 저는 그 만화를 계속 보고 있었어요. 바로 <보노보노>입니다.
어릴 적엔 그저 무심히 보던 만화였는데, 최근 보노보노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이유는 간단했어요. 보노보노는 느림과 힐링의 대표 만화라 합니다. 아이들이 아닌 바쁜 일상과 현대의 삶에 지친 성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해요. 만화를 통해 힐링을 한다? 최근에는 보노보노를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어요. 만화를 다시 볼까 하다 대신 책을 한 권 읽어보기로 합니다. <서른은 예쁘다>의 김신회 작가님이 보노보노를 통해 느낀 에세이식 책입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 김신회 / 놀>
책의 구성은 작가님의 경험과 보노보노의 만화 장면을 디졸브 시킵니다. 보노보노의 모습에서 작가님의 행동을 반성할 때도 있고 공감할 때도 있어요. 저 역시 책을 읽으며 작가님의 삶과 보노보노의 모습에 공감을 느낄 때가 많았어요. 아무래도 작가님의 경험이 더해진 만큼 그런 것일지도 몰라요.
(35쪽)
평소 내 일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나를 자주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지만 웬일인지 만나면 그다지 편치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괜히 까다롭게 구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즐겁지 않은 건 사실이니 난감하기만 했다. 대체 왜 나는 그 친구가 불편할까.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친구와 만나던 자리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요즘 있었던 속상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친구 앞에서 나름의 조언을 이어갔다. 그러던 도중에 친구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럴 땐 충고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면 안 돼?"
갑작스레 날아든 돌직구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불현듯 그 친구 얼굴이 떠 올랐다. 아, 이런 거구나. 그래서 내가 그 친구를 불편해했던 거구나.
아, 저 역시 이런 친구가 있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래된 친구예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모일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가끔 이 친구와 둘이서 술을 한 잔 할 때가 있어요. 이상하게 이날은 집을 돌아오는 길이 개운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어디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생각해 봤는데 답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이 친구와 둘이서 술을 마시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어요. 어느 날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서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다른 친구가 일이 생겨 못 온다면서 제게 말을 하더군요.
"걔랑 술 마시다 싸우지 마라"
아, 그랬었어요. 이 친구와 술을 마시면 대부분 언성이 높아졌던 것 같아요. 싸운 것은 아니에요. 대부분 술을 마시는 이유 중의 하나가 푸념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90% 이상의 푸념이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었죠. 하지만 저의 푸념에 꼭 이 친구는 답을 내려주려 했어요.
"거기서 왜 그렇게 행동했냐, 니 잘못이네. 다른 방법이 있는데, 너무 소홀했네"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제가 잘못한 것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닌데,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그 말에 반감이 생겨 언성이 조금 올라갈 때 있어요.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충고가 아니었어요. 그냥 공감이면 된 것이었죠. 충고를 하려는 이 친구와 둘이서 술 마시는 일이 불편한 것이었어요.
책을 읽으며 저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이 친구만 탓할 일이 아니었어요. 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나 위로랍시고 말을 건넨 적이 많더라고요. 친구들의 푸념을 이해한다면서 덧붙여 제 생각을 말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이런 행동 하나가 모두 충고와 마찬가지였어요.
제 딴에는 그 친구를 이해하고 위로한다고 꺼낸 말이었지만, 상대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을 듯했어요. 어쭙잖은 위로는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셈이에요.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은데 다른 사람의 위로나 충고가 제대로 들릴까요? 저도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냥 누군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 대부분이었던 것이었죠.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이제부터라도 친구들이 푸념을 한다면 입을 무겁게 하는 습관을 들이려 합니다. 그 친구들이 원하는 것은 경청일 테니까요.
(17쪽)
나는 멋진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상해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다. 그저 그 마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게 침묵이건, 농담이건, 그저 경청하는 태도건 위로를 해야 하는 순간을 떠 올려 보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그저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가장 많이 위로받았다. 진정한 위로는 내가 받고 싶은 위로다.
저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에요. 가끔은 재미있자고 한 게임에 너무 진지하다면서 혼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은 이기든 지든 승부에 승복하는 편이지만, 어릴 적에는 그러질 못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운동회에서 추첨을 통해 선물을 줬던 적 있어요. 그 추첨에서 저는 선택되지 못해 선물을 받지 못했죠. 그날 얼마나 서글펐는지 주먹을 꽉 쥔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추첨에서 조차 이렇게 억울했는데, 친구들과의 시합에선 더 했죠. 진다는 것은 정말 기분 나쁜 일이라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과 버릇이 없어졌어요.
'세상 일이 내 마음처럼 모두 되진 않는다.'
어떻게 보면 포기라는 말이 맞겠죠. 아마 그런 생각이 들 때부터인가 지는 것에 대한 화와 억울함이 줄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졌을 때의 표정까지 그러진 못했던 것 같아요. 책에 야옹이형과 결투를 마치고 피투성이가 된 큰 곰 대장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156쪽)
"아가야, 아빠는 또 야옹이 형에게 졌단다. 하지만 아들아, 졌을 때의 아빠 얼굴도 잘 봐둬야 한다. 잘 봐라. 이게 졌을 때의 아빠다."
오직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졌을 때의 얼굴' 앞에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 고개를 돌리거나, 도망치거나 부정하는 게 다다.
하지만 큰 곰 대장은 그러지 않는다. 이기고 싶어서 시작한 싸움이지만 졌다는 결과 역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창피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져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이긴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길 때보다 질 때가 많은, 결코 좋지만은 않은 것이 삶이라는 걸 큰 곰 대장은 알려주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졌을 때의 얼굴'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코로나와 경기침체 등의 영향으로 주변에서 힘든 분 많아요. 저 역시 좋다고 만은 할 수 없어요. 그러다 보니 가끔은 책이 위로가 될 때가 많아요. 머리가 혼란스럽거나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가끔은 책에 조금 더 집중하곤 합니다. 지금은 힘든 시기이지만 이 시기가 지나가면 더 좋은 날이 오기를 바라봅니다.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도 졌을 때의 얼굴도 중요하지만, 이겼을 때의 얼굴을 볼 수 있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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